“올봄, 연차 휴가로 이탈리아 남부 여행을 기다리던 직장인 A. 코로나19로 인해 예약을 취소하고 열심히 재택근무 중이다. 삼시 세끼 배달 음식에 새벽 배송해 주는 냉동 식품도 지겨워,난생 처음 유튜브를 보며 집밥 요리를 시작했다. 요리는 장비빨이라고, 성능 좋은 프라이팬과 예쁜 인스타 감성의 그릇 세트까지 구매했다. 식비가 많이 드는 것 같아서 채소나 콩나물은 직접 재배해서 먹으려 도전 중이다. 유럽 여행 비용 아꼈다고 생각하고 1년간 온라인 검색만 하던 식기세척기와 의류 청정기도 마침내 구매하게 되었다. 회사 사정이 안 좋아져 며칠간 무급휴가를 내고 주머니 사정은 더 팍팍해졌지만, 주말 브런치 비용 아끼고 봄옷 장만도 포기해서인지 그럭저럭 살만은 하다. 바이러스가 무섭다고 내 미모 관리까지 포기할 순 없어 이 기회에 피부과 시술도 몰래(?) 받았다. 코로나 상황이 언제 나아질지 모르겠지만 이번 주말도 날씨가 좋아서 혼자 근교로 캠핑을 하러 갈 생각이다.”
코로나19가 바꾼 장바구니
코로나19가 바꾸는 소비 및 유통의 지형 변화가 크게 다가온다. 그런데 소비자는 의외로 침착하다. 과거 경기 침체 시기(1998년, 2008년)나 사스(SARS), 메르스(MERS) 사태와 비교해 봐도 소비자는 보다 능동적이며 슬기롭게 적응하고 있고, 유통도 위기를 기회 삼아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국내 소비자의 모습은 익히 보기 때문에 글로벌 소비자의 생활은 어떨지 궁금하다. 일단 소비자를 이해하는 가장 쉽고 확실한 방법은 지갑 속 지출 패턴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이번 닐슨 글로벌의 포스트 코로나 대응 관련 연구 결과에 따르면 식료품, 교육, 커뮤니케이션, 의료 서비스 지출은 비슷하거나 소폭 늘어난 반면 여행, 대중교통, 저축 및 투자, 외식 및 의류비 지출은 대폭 감소했다.
소비자 장바구니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소비 계층별 수요 변화도 예측해 볼 수 있다. 일단 코로나19는 빈부 격차를 더욱 키우고 있다. 이에 따른 소비 양극화와 계층 간 장바구니 구성 변화도 예상된다. 모든 소비 계층에서 건강기능식품 수요는 증가한다. 바이러스를 피할 수 없다면 면역력을 높여 극복하는 방법을 선택한다. 사태 장기화에 따라 중산층 가구 내 신선육류 소비는 지속 늘겠지만, 저소득층에서는 경제적 부담으로 베이킹 제품 소비로 하향 이동한다. 주류, 담배도 저소득층에서의 소비 감소가 두드러지게 된다.
소확행? 소확안! (작지만 확실한 안전)
그렇다면 코로나19 이후 소비 및 유통 트렌드 변화의 중심은 무엇일까. 먼저 소비자가 브랜드와 제품을 선택할 때 고려하는 주요 가치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 ‘건강, 안전’이라는 가치는 위기 상황 때마다 중요해지는 속성이다. 그러나 글로벌 팬데믹 상황이 주는 불확실성의 무게감 때문에 ‘편의성’을 실생활에 결합한, 작지만 확실한 건강과 안전이 중요해졌다. 이제 집이나 길거리에서 즐겨 먹는 작은 스낵 판매에서도 면역력을 높여준다는 메시지는 중요하다. 벨기에에서는 모바일 앱을 통해 주변 매장에 내가 원하는 제품 재고가 있는지, 매장은 위생적으로 안전한지, 언제 가면 덜 붐빌지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중국은 이커머스 선진국답게 리테일 테크 접목에 적극적이다. 코로나 확산 기간에 자율 무인 카트가 인간을 대체한 언택트 배송 수단으로 주목 받았다.
건강과 안전의 가치가 이전보다 강화되며 특히 식료품 시장에서는 제2의 오가닉 푸드 열풍이 예상된다. 소비자에게 집에서의 요리가 일상화되고 여유 있는 슬로우 라이프가 익숙해지며 식자재는 직접 키워서 먹는 자급자족형 라이프스타일이 나타난다. 텃밭 화분, 상추 모종, 콩나물시루 및 새싹 재배기 매출 성장이 두드러진다.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하는 슬로 푸드 재료도 많이 찾는데 곰솥과 사골뼈, 떡 재료인 멥쌀가루와 떡시루 매출도 늘고 있다. 코로나19로 식생활에 대한 소비자의 기대 수준이 세분화되고 높아지고 있어 유통 측면에서는 가격보다는 건강과 큐레이션 그리고 적시 배송이 담보된 다양한 카테고리 전문식품몰이 중요해질 것이다. 또한, 공급업체는 신선 및 소재 군의 MD 역할을 하므로 이들의 다양한 식자재 및 레시피 개발 역량이 더욱 주목받게 된다.
Local(지역주의)의 귀환
전 인류가 코로나바이러스와 싸우면서 수십 년간 이어져 온 글로벌화가 지역주의로 회귀하고 있다. 공급망 이슈가 부각되었고, 투명하고 신뢰도 있는 원산지의 상품에 대한 니즈가 강해졌다. 지역 간, 국가 간 이동이 어려워지면서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 상품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정부 차원의 지역 경제 활성화도 한몫하고 있다. 호주에서는 지역별 배달 음식 모바일 앱을 만들어 지역 경제 주체들이 로컬 제품 소비와 비즈니스를 독려하고 있다. 동유럽의 한 슈퍼마켓에서는 “Yes Local!” 캠페인을 통해 지역 농산물 소비를 유인하고 로컬 공급 업체들을 지원하고 있다. 실제 코로나19 확산 기간 동안 로컬 원산지 제품(예: 가공식품, 반려 사료 용품, 개인 생활용품 등)의 시장 점유율은 이전 대비 최소 2% 이상 늘어났다. 또한, 지역을 기반으로 오랜 기간 신뢰를 쌓아 왔던 로컬 브랜드 역시 위기 상황에서 강한 시장 지배력을 보인다. 라면, 스낵, 맥주 같은 전통적인 로컬 1위 브랜드 점유율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물론 특정 국가 브랜드가 결합된 원산지 효과는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우수한 방역 체계로 한국 브랜드 위상은 한층 높아져 일부 국내 개인 생활용품 브랜드는 오히려 온라인 역직구 열풍이 일고 있다.
소비자 라이프스타일도 로컬 커뮤니티 중심의 생활권으로 당분간 고착될 수 있다. 소위 ‘슬세권’(슬리퍼 신고 편의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지역)이 중요해지며 거주 공간 주변에서 모든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주거 문화도 뚜렷해질 것이다. 이에 따라 근거리 슈퍼마켓은 지역 기반 소비자 라이프스타일에 맞는 세분화된 구색과 직장·주거 근접성을, 온라인 유통은 지역 기반 D2C(Direct-to-Consumer)가 다양성과 전문성을 기반으로 고도화될 것으로 보인다.